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왜 모든 국가가 달러로 결제를 해야 하는지 저녁마다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신개발은행’은 신흥국들이 아무런 위임 없이 통치하려는 전통적인 금융기관에 굴복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잠재력이 있다.”

지난해 4월 12일 중국을 방문한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이렇게 ‘달러패권’에 대한 거부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룰라 대통령이 방중 이튿날 ‘신개발은행’ 본부를 찾아 한 발언이다.

신개발은행은 브라질과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브릭스가 서방 국가 주도의 금융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2015년 설립한 국제 금융기관이다.

중국과 브라질은 또 수출입 결제와 금융 거래에서 달러화 대신 자국 통화인 위안화와 헤알화를 쓰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반미친중’ 노선을 걸었던 룰라 대통령이 요즘 고민에 빠졌다.

◇브라질마저 등돌린 세계 휩쓰는 중국의 덤핑공세

“중국산 제품의 약탈적 영업에 맞서 국내 시장을 지켜야 한다.”

다름아닌 전통적인 친중국가인 브라질의 업계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이다.

지난 17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브라질 정부가 철강, 화학제품, 타이어 등 최소 6개 분야에서 반덤핑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FT는 "브라질의 조치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중국이 부동산 경기 둔화와 내수 침체로 과잉 생산에 직면한 뒤 전 세계가 중국발 수출 홍수에 대비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도했다.

브라질 대형 철강 생산업체인 CSN은 이달 초 “2022년 7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중국산 특정 유형의 탄소강판 수입이 85% 가까이 증가했다”며 반덤핑 조사를 요청했다.

브라질의 중국산 철강 및 철광석의 총 수입액이 2014년 16억달러에서 지난해 27억달러로 폭증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친중 노선을 걸어온 룰라 대통령에게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고민거리가 생긴 것이다.

때문에 FT는 “브라질은 최대 무역 파트너이자 철광석, 대두 같은 상품의 주요 구매국인 중국과의 대립을 피하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국내정치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룰라 대통령의 입지가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다.

국내 양대 철강사인 포스코와 현대제철도 중국산 등 수입 강판에 대한 덤핑 조사 신청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반덤핑관세가 시행될 경우 중국산 열연강판을 통해 제품 경쟁력을 확보했던 국내 철강업체들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고 있어 추진이 쉽지는 않다.

이미 국내 업체들이나 소비자들은 값싼 중국산 제품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산 열연강판(SS275 기준)은 t당 87만∼88만5000원에 공급된 데 비해 수입 제품은 이보다 7% 안팎으로 저렴한 82만5000원 수준에 공급되고 있다.

중국의 밀어내기 수출은 철강·전기차·배터리·석유화학·유통 등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산 저가 공세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는 한국의 경우 중국의 ‘디플레 수출’의 직격탄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21일 미국과 유럽의 무역 장벽에 막힌 중국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로 전기차 수출 길을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장조사업체인 카운터포인트의 양왕 수석 애널리스트는 “중국으로선 전기차 수출 강화로 국내 시장의 과잉 생산을 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안화 약세 유도 ‘근린궁핍화정책’ 시동거는 중국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22일 달러당 위안화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인 7.2위안대를 돌파했다. 위안화는 내수침체를 우려하는 중국인민은행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쉬안창넝 인민은행 부총재는 지급준비율(RRR·지준율) 추가 인하 여력이 있다고 밝히는 등 통화 공급 확대를 공언하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마저 마이너스 금리에 종언을 고하는 등 국제 외환 시장의 흐름도 중국 위안화 약세 추세를 거들고 있는 형편이다.

위안화 약세는 원화 가치도 동반 하락을 유도하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한국 제품을 밀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하나은행 자금시장영업부는 보고서에서 “중국의 저물가 기조 속에서 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점을 감안할 때 24년 중국 외환당국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시행해갈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위안화 약세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국가 중요 정책 중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이투자증권 보고서는 “위안화 약세는 무엇보다 중국 내 디플레이션 리스크의 수출을 의미한다”라며 “중국 정부가 달러-위안 환율을 어느 수준까지 용인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달러-위안 환율 추가 상승폭에 따라서는 소위 ‘근린 궁핍화’ 현상은 더욱 확산될 공산이 높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근린궁핍화현상’은 다른 국가의 경제를 희생, 즉 궁핍하게 만들면서 자국의 경기회복을 도모하려는 경제정책을 말한다.

원래 정식 용어는 ‘근린궁핍화정책’인데 영국의 경제학자 J. V 로빈슨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문명인 ‘베거 마이 네이버(Beggar-my-neighbor)’란 ‘상대방의 카드를 전부 빼앗아 온다’는 트럼프 카드게임 용어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중국의 디플레이션 수출이 선진국을 넘어 개발도상국까지 확대될 수 있다”며 “1990년대보다 더 광범위한 영향을 세계 경제에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책 연구기관인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유로스탯(Eurostat) 통계를 분석한 결과, EU 국가들은 지난 한해 5600억달러(약 747조원) 상당의 상품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미·중 무역 전쟁이 발발한 2018년 당시 3730억달러(약 498조원)와 비교하면 50.1% 늘어난 수치다.

국제무대에서 지칠 줄 모르는 중국 제품의 맹위는 우리나라 EU 수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알리 등 중국발 저가 공세, 국내 제조·유통업 망가트리는 트리거 역할

중국 직구 플랫폼 알리익스프레스의 공세가 연일 우리 언론매체를 달구고 있는 가운데 테무도 국내 시장 공략에 시동을 걸고 있어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테무는 중간 유통구조가 없는 탓에 소비자들은 많은 품목에 있어 알리익스프레스보다 더욱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테무는 '억만장자처럼 쇼핑하라'고 외치고 있다. 테무가 파는 제품들이 너무 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의 만 19~6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품질에 대한 신뢰도는 낮아도 가격적 측면에서는 구매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물가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싼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알리익스프레스가 한국 상품을 대상으로 10억원 어치의 랜덤쿠폰을 제공하자 행사 첫날에만 17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면서 조기 종료되는 현상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국내 소비자들이 중국의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같은 사이트에서 직접 구매를 하게 된다면 국내 제조·유통·마케팅 사업 전반이 무너질 것은 불문가지이다.

중국이 퍼트리고 있는 저물가 제품들이 소비자들에게는 일시적인 득이 될지는 모르지만 전방위에 걸쳐 일자리 감소가 이어져 결국 국민 전체의 소비여력이 감소하는 ‘궁핍화 과정’이 진행되는 역설이 현실화될 수 있다.

국내 유통업이 발전하면 소비자와 중소기업 모두 살아나지만 중국 플랫폼에 안방을 내주면 국내 유통업 생태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점은 반드시 일자리 감소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일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알리 등의 관세포탈액은 139억원으로 2년새 10배 넘게 폭증했다고 한다. 세관 직원 34명이 쏟아지는 물량의 1% 정도만을 검사한 결과가 이 정도라고 하니 실제 규모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국내 시장을 어지럽히는 과정에 있다.

이처럼 중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디플레를 수출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국내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범위와 영향을 정확하게 측량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 정책 당국이나 이해관계자들이 어떤 대응책을 내놓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 자체가 오리무중(五里霧中)에서 우물찾기처럼 어렵다.

중국의 디플레 수출보다 더 우려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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